이 책을 읽게 된 당시 나는 회사를 관두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겠다며 독일에 머물던 시기였다. 그러나 흥미라는 게 나라를 이동한다고 해서 번뜩 생길 리 만무했고, 자아 탐색과 함께 집을 구하고 언어 공부까지 해야 했던 내게, 미래는 우선순위 없이 모든 게 중요한 시험 범위처럼 느껴졌다. 그런 두서없는 나날이 이어지는 중에 리베카 솔닛의 책을 만나게 되었다. 독일에 놀러 온 친구가 《길 잃기 안내서》를 빌려준 것이다. 부제는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나는 솔닛의 언어를 손전등 삼아 마음 편히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연히 샛길로 간다고 해서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솔닛은 물리적 길 잃기를 포함한 정신적 길 잃기의 필요를 말했다. 그렇다면 정신적 길 잃기란 무엇인가. 솔닛은 답했다. “성인기는 신중한 예상과 철학적 기억으로 이루어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느리고 착실하게 길을 찾는다. 하지만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도 있다.“ 사실 그랬다. 이곳까지 온 스스로를 용감한 탐험가라고 여겼지만 따지고 보면 온갖 보호장비를 두른 채 만만한 모험만을 즐기는 소극적 여행자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내가 되겠다며 떠나왔으면서 사실 나를 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나를 안전에서 내쫓았다. 학원에서 실수할까 봐 꾹 다물었던 입을 열어 자발적인 바보가 되어보고, 낯설고 어색해서 한동안 피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다시 이어갔다. 한국에서 맡았던 모든 역할을 지웠다. 누군가의 딸, 어떤 카테고리의 에디터, 어떤 취향을 가진 29세 여성…. 솔닛이 집, 폐허, 푸른 그림, 가족의 역사 등을 따라 미지의 세계에 도달한 후 기억의 오류를 발견하고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 것처럼, 나 또한 끝까지 나라고 믿고 있었던 나를 하나씩 탈의함으로써 나의 새로운 면과 마음 밑바닥에 있던 은밀한 바람을 발굴할 수 있었다. 솔닛의 말대로 “스스로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해도 사실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간”들이 내게 방향을 지목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삶의 목적을 잃었거나 재탐색하고자 한다면, 완전히 자신을 리셋해보자고. 완벽히 길을 잃어보자고. 목적을 세우는 일은 나를 먼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니까. 준비물은 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아이야말로 제대로 삶을 만끽할 줄 아는 능숙한 탐험가다. 그들의 주머니를 살펴보시라. 모래알, 꽃잎, 퍼즐 한 조각 등 순간에 충실한 기념품들이 거기 있다. 사회의 관성대로 살아가는 어른에겐 분명 어려운 일일 테지만, 그래도 솔닛은 말한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발견하는 삶은 둘 사이 미지의 땅 어딘가에 있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하지만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비행기 티켓처럼 건네고 싶다. 그다음 미지의 땅을 찾는 건 당신의 몫이다.